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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계심리

한 아이가 전쟁을 끝냈다

by 마음정원지기 2025.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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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이 세상을 움직인 날

– 대리 트라우마와 감정 이입의 심리학 혹시 이 사진을 기억하시나요?

전쟁터 한복판에서, 벌거벗은 채 맨발로 울부짖으며 도망치는 작은 소녀.

뒤에는 검은 연기와 불길이 일렁이고, 그 속에서 혼란에 빠진 군인들과 함께 울고 있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아이, 눈은 공포에 질려 있고 입은 소리 없이 벌어져 있으며 몸은 심하게 화상을 입은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죠.

그 아이의 이름은 팜 티 킴 푹(Phan Thị Kim Phúc).

그녀는 1972년 6월 8일, 베트남전 중 나팜탄 공격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절규를 포착한 사진 한 장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수백 개의 기사보다, 수천 마디의 말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전쟁에 대한 여론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죠.

말보다 강한 ‘감정의 이미지’

킴 푹이 찍힌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고통의 실체였고, 전쟁의 민낯이었으며, 누군가가 겪는 삶의 절망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었습니다.

그녀가 뛰던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눈시울을 붉히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죄책감이나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사진을 보는 우리는 전쟁터에 있지 않았고, 총알이나 불길을 직접 마주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고통을 내 일처럼 받아들였고, “이게 뭐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는 생각에 마음 깊숙한 곳이 울렁이기 시작했죠. 왜일까요?

그건 바로 인간의 놀라운 감정 기능, 감정 이입(Empathy) 때문입니다.

겪지 않았지만, 마치 내가 겪은 듯이 느낄 수 있는 능력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감정 이입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정 이입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는 능력이다.” 우리는 공감하는 존재입니다.

타인의 표정, 몸짓, 상황을 바라보며 그 사람의 감정과 연결되는 회로를 가지고 있어요. 특히 사진처럼 강렬한 이미지는, 생생한 감정의 전달자 역할을 합니다. 킴 푹의 사진이 그러했죠.

그녀가 느꼈을 공포와 절망은 고스란히 사진을 타고 퍼져나갔고, 그걸 본 사람들은 직접 겪은 것도 아닌데도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반응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이 사진을 보고 밤새 울었고, 어떤 이는 그날 이후 평화운동가가 되었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전쟁 반대 서명과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죠. 그게 바로 감정 이입의 위력입니다.

뇌는 ‘남의 고통’을 곧바로 ‘내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이런 강한 감정 반응은 단지 마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뇌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현상입니다. 우리 뇌에는 거울 뉴런 시스템(Mirror Neuron System)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건 타인의 표정이나 감정을 관찰하는 순간 내가 마치 그 감정을 직접 느끼는 것처럼 뇌가 반응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아파하면 나도 괜히 얼굴을 찡그리게 되고, 누군가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게 되고, 누군가가 울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거예요.

킴 푹의 사진을 본 사람들 역시 그녀가 겪은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했고, 그 감정은 이성보다 빠르게 퍼져 결국 전 세계적인 공감과 분노를 만들었습니다.

반복적인 감정 이입은 ‘대리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합니다

한 번의 감정 이입은 공감을 낳지만, 그게 반복되고 강도가 세질수록 정신적인 피로와 외상 반응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를 대리 트라우마(Vicarious Trauma)라고 불러요.

예를 들어,

●전쟁 보도를 매일 편집하는 기자

● 피해자 상담을 반복해서 듣는 심리상담사

● 구조 현장의 목격 장면을 그려야 하는 만화가나 작가

이런 사람들은 실제 사건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감정 이입으로 인해 자신도 외상 증상을 겪게 되는 거죠.

킴 푹의 사진을 본 사람들 중에는 그 장면이 너무 강렬해서 한동안 꿈에 나왔다는 사람도 있었고, 정치인이나 평화운동가들 중에서는 “그 사진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감정은 단순히 느끼는 것을 넘어서 사람의 가치관과 행동, 심지어 삶의 방향까지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나는 괜찮은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

이건 요즘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일지도 몰라요. 전쟁 뉴스, 재난 보도,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SNS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슬픔과 분노.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고, 눈물이 맺히고,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은 날도 있으시죠? 그게 바로 감정 이입이고, 때로는 대리 트라우마의 초기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감정은 내가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하죠.

감정을 통해 세상이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킴 푹은 이후 삶에서 오랜 시간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나팜탄 화상으로 인해 수십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어요.

“그날 나는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내 사진이 누군가에게 평화의 이유가 되었다면,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거예요.” 이 얼마나 강한 이야기인가요?

한 아이의 고통이 단순한 슬픔이 아닌, 세상의 변화를 일으키는 감정의 연결점이 되었다는 사실.

이건 감정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인간의 능력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마무리하며 – 감정 이입은 세상을 바꾸는 감정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낀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마음의 여백이 있어야 하고,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일 용기와 체력도 필요하죠. 하지만 그걸 해내는 능력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더 나은 사회로 이끄는 거예요.

킴 푹의 사진은 그냥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감정이 세상을 바꾼 순간이었고, 공감이 전쟁을 멈추게 한 증거였습니다.

그 사진을 본 우리 모두는 잠시나마 전쟁터에 있었고, 그 소녀의 절망을 함께 느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감정이 평화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죠.

지금도 어딘가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우리가 다시 한 번 연결되어야 할 때입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변화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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